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5년 세웠다.
국민 모두는 참선비를 그리워하고 갈망한다.이이는 물론 양친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특히 부패한 나라를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망한다며 온갖 개혁적인 저서를 남겼다는 점으로 보아도 두 분은 유사점이 많은 학자요 참선비였다.문무에 능하여 담당하지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혼탁한 세상에서 어진 재상을 대망하듯이.
(『동호문답』) 정치를 통해 평화롭고 복된 세상이 되게 하고 학문을 통해 후세의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참선비라고 하였다.그들이 과연 다산이 기롱(譏弄)한 잘못된 선비들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비록 자신들이야 재상이 되지도 못했고 역할을 부여받지도 못했으나.
공허한 공유(空儒) 등 못된 선비도 많다고 했다.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
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월남망국사』가 베스트셀러였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역사인식의 정치화는 너무나 위험하다.조선 정부는 떠 넣어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